작가 소개
정지아
1965년 전남 구래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 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 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김유정 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 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줄거리및 감상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유쾌하고 깊이 있게 풀어 낸 이야기책이다
무조건 경쾌하고 웃겨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성공한 책으로, 책에 깔려 있는 기저는 슬픈데, 중간중간 깔아놓은 웃음 코드가 쉴 새 없이 독자로 하여금 팡팡 터지게 만드는 책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추천사로 “해학적인 문체로 이해와 화해를 풀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감탄스럽습니다.”라며 추천했고, 유시민 작가는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다”라며 칭찬한 책이다.
빨치산이라는 주제로 쓰인 책이지만 이 책은 다큐가 아니라 읽는 소설이다.
젊은 층에게 빨치산은 생경한 단어인가 보다.
“빨치산이 지리산 옆에 있는 산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설은 빨치산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찾아온 아버지의 우파와 좌파 친구들과 다양한 손님들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현재 작가가 살고 있는 전남 구례라는 마을이 이 소설의 배경이고 전라도 사투리가 아주 찰지고 구성지게 소설에 구사되어 있다.
“구례는 지리산과 백운산 같은 큰 산들이 인접해 있어 빨치산과 같은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는 공간이라 그중에 몇 개의 이야기를 가공해서 소설로 옮겨 놓은 것뿐”이라고 작가는 책 소개에서 말한다.
책표지를 보면 빨치산 이야기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경쾌하고 가볍게, 마치 즐거운 나의 집이 연상되듯 꾸며 놓았다.
‘아버지의 해방 일지’란 소설의 제목은, 출판사 창비의 영업팀에서 얼마 전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 일지’란 제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다.
사회주의라는 신념과 유물론을 신앙처럼 숭배하며 사신 부모님이시지만, 이 신념을 금기시하는 사회를 살면서, 한 인간으로서 어머니와 아버지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소설의 첫 문장이 대박이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전선을 연결하고 지지해 주는 전봇대를, 아버지가 항상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던 의지로 비유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긴 소설이 아님에도 등장인물이 많고 캐릭터들이 생생히 살아 눈앞에서 움직이듯 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의 오고 가는 대화와 행동들의 티키타카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 높여준다.
늙은 혁명가인 어머니의 잔소리를 단번에 끊어내는 아버지의 필살기는
“자네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어머니의 눈물 바람도 악다구니 같은 잔소리도 단박에 멈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툭하면 나오는 유물론 조크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 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 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 내 결론이었다. p 67
“고상욱이 본 사람 손들어!”
군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불린 순간 18 살이었던 큰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는 직감적으로 고상욱이 작은삼촌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혹 누가 쨔가 고상욱이 조칸디라, 이러기라도 할까 봐 언니는 가슴 졸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키가 작아 언니보다 두 줄 앞에 앉아 있던 작은 아버지가 번쩍 손을 들었다.
“고 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잉마요.” p126
형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비극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일로 동생은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간다.
작은아버지는 형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를 죽게 한 자책으로 평생을 술에 취해 흘려보내며 형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유골을 끌어안고 통곡한다.
아홉 살에 어긋난 형제가 칠십 년 가까이 지나 부둥켜안는 것이다.
연좌제에 얽혀 8년을 사귄 연인과의 결혼이 깨지고,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신원 조회에 걸려 입학이 불허되는 등 가족과 친척들이 겪었던 경험들은 우리 사회에 실제로 흔히 있었던 일들이다.
아버지인 고상욱 씨는 전직 빨치산이었으며 사회주의자로 20년 가까운 옥살이를 하고 고향인 구례에 터를 잡았다
민중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혁명가답게 방물장수 하룻밤 재워주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할 때도 민중을 끌어들인다. 민중이라는 말 앞에 어머니는 냉큼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으로 얼굴까지 붉히는, 두 분은 순수한 사회주의자였다.
아버지는 귀하디 귀한 하나뿐인 딸의 외모 평가도 ‘하의 상’이라 평가할 정도로 냉정한 합리주의자다.
유물론자답게 죽음 뒤를 믿지 않았고, 치매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때 유물론자답게 마침맞게 죽음을 맞이했다.
구례라는 곳은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힌 작은 감옥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민중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았다.
다문화 가정 아이의 이야기는 약간 무거우나 감동적이고 따뜻하다. 아이의 엄마는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 위대한 민족의 이주민 여성이다. 몇몇 이주민 여성들의 불행한 가정사가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약자인 다문화 가정의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추구하는 민중과의 연대의 철학이 잘 드러나있다.
등장인물 중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황 사장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친오빠 보다 더 친오빠스럽게 오지랖 넖게 주인공을 참견하며 장례식 내내 챙겨준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 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끄러웠다. P 197
작가가 구례에 살면서 배운 마음을 표현한 대목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 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p.33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책 속의 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아버지지만, 나의 아버지가 계속 생각이 났다.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를, 살아가면서 한 번도 이해해 보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아버지가 자꾸 생각이 났다.
두껍지 않은 소설책임에도 몇 부작 소설을 읽은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과연 정지아 작가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흡족한 영화를 만났을 때처럼, 훌륭한 소설책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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