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장편소설. 베스트셀러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 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ㅡ ‘작가의 말’에서
김금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짧은 소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 현대문학상, 우현예술상, 2020년 김승옥 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부모의 부도로 남동생 영웅은 돈암동의 큰아버지에게, 화자인 이영초롱은 제주의 본섬에서 배 한 번 더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섬에, 보건소 의사로 일하고 있는 고모에게 맡겨진다. 부모에게 제안서까지 써가며 서울에 남고 싶어 했지만 절망적인 상황을 되돌리진 못했다. 1999년 봄이었다.
무료하고 침울한 고고리섬에서 섬 둘레를 걷다가 우연히 복자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복자는 당차고 무람없는 성격의 아이였다.
복자는 처음 만나는 이영초롱에게 섬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 할망당에 인사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하며, 할망신에게 데려가 절을 시킨다. 복자는 영초롱에게 서울에서 왜 왔는지도 직접 말하라고 한다.
“우리 집이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복자 쪽에서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일단 입을 열자.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울에서 나쁘게 지냈습니다. 아빠 친구라고 해서 문을 열어줬는데 남자들이 신도안 벗고 들어와서 욕설을 하였고 싸웠습니다 아빠가 신발을 벗으라고 하자. 남의 돈을 안 갚은 집은 사람 새끼들 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베란다 창고에 숨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영웅이는 거실에서 다 봤습니다.”
“아, 경헸구나.”
듣고만 있기 뭣한지 복자가 맞장구를 쳤다.(24쪽)
영초롱은 엉겁결에 일생일대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고, 마찬가지로 엉겁결에 타인의 비밀을 듣게 된 복자는 진심으로 영초롱의 이야기에 반응해 준다.
그렇게 둘은 절친이 되었다. 비밀을 공유한 막역한 단짝. 영초롱은 복자로 인해 낯선 섬 생활에 잘 적응을 한다. 그러다 마을 어른들의 일로 둘 사이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한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한 번 받은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듯 포장하는 기술도 없었고, 잃어버린 친구의 신뢰를 회복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화해도 못한 채 영초롱은 서울로 떠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영초롱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어 제주 법원으로 발령을 받아서 오게 된다.
제주에 오기 전 서울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변호사를 사지 못하고 오직 판사의 양심에만 의지해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고 법정에 와있는 이들, 재판을 위해 보아야 하는 증거 자료들, 폭행의 상처와 순간들에 노출될수록 무뎌지는커녕, 점점 더 예민하고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워졌다. 개개인의 애닮은 사연들이 평면화되는 것을 보며, 판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분노의 목적과 명분은 사라지고, 그냥 분노라는 상태만 남아 영초롱은 활활 타고 있었다. 처방 약이 없으면 잠들기 힘든 불면의 밤이 지속되었고, 법정에서 기어이 엿 까세요라고 욕설을 한 이유로 영초롱은 제주의 법원으로 징계성 인사를 당해 내려오게 된다.
영초롱에게 과거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깃든 곳, 유년의 장소에서 복자와 재회한다. 복자는 그곳에서 거대한 불합리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복자는 제주의 영광 의료원에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유산을 하고, 같은 피해를 입은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산업재해 인정을 받아 내고자 투쟁을 하고 있었다. 영광 의료원은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도 행정소송을 제기해둔 상태였다.
이영초롱은 이번엔 자신이 복자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법의 대리자로 소송에 합류한다. 하지만 복자의 간청으로 영초롱은 이 재판에서 물러나게 된다.
복자에게 돌아가서 “너.” 하고 부른 채 얼굴을 바라보다가 “잘 지내” 하고는 돌아서 차를 탔다. 나는 그때 복 자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더 아팠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믿을 힘이 없다는 것. 눈으로 보이지 않는 편까지 헤아려 누군가의 선의를 알아주기 힘들다는 것까지는 나 역시 헤아리지 못했다. (217쪽)
복자의 의료원 소송은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산재 사건과 그 소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소설 속에는 제주의 4.3사건, 판사 블랙리스트 파문, 국정 농단 사건 등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이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있다.
현실의 사건들에 있어 김금희 작가는 애틋한 미화 없이 냉철한 시선으로 사건들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복자를 비롯한 제주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실패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긍정의 힘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깨우쳐 주고있다.
어찌하든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이영초롱도 서투르고 실패한 지난 시간을 딛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회복되어 간다.
바다 위에 그 작은 고고리 섬이 떠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연속해서 몰아치는 파도를 견뎌가며 섬은 마치 가지를 뻗듯 선착장과 부두를 만들고 꽃처럼 다채로운 지붕의 집들을 피우고 보리밭과 해바라기 밭을 보듬으며 거기에 있었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181쪽)
이 소설은 작가가 제주에서 지냈던 날들에 영감을 받아 소설로 탄생했다. 고고리섬의 청보리밭과 보건소, 해녀들의 실루엣까지, 너무 생생해서 제주에 가면 고고리섬을 가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작가의 상상력이 척박한 나의 두뇌에 아름다운 섬을 지어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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